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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하루오의 『십계』 리뷰 - 성서(Bible)의 '십계명' 과 소설 속 '열 가지 규칙'

Sirmail 2026. 1. 7. 11:15

유키 하루오의 『십계』 는 다 읽고 난 뒤 더 재미있어지고,

두 번째 읽을 때가 훨씬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소설의 중반까지는 장면들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거나

주고받는 대화가 '너무 서브텍스트가 많은' 느낌이라 진도가 잘 안 나간다거나 하는,

약간은 루즈한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런 부분들도 소설이 끝나고 나면

완성도를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장치들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특히 성서(Bible)의 '십계명' 과 소설 속 '십계' 가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성서에는 '십계명' 이라고 하는, 신(하나님)이 인간(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열 가지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백성이 되려면 지켜야 하는 열 가지의 규범이자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백 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로 혹사당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얻은 백성들은 광야에서 물과 음식 부족, 적대적인 민족들의 위협 등 생존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불평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했을 때는 약 200만 명 규모의 대규모 집단으로, 조직화된 사회 체계/법 체계가 없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탈출 전에는 이집트의 다신교 문화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수원시와 용인시의 인구를 합하면 200만 명 정도입니다.)

 

십계명의 전달은 위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두 가지의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이라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뢰하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절대자가 만든 규칙을 따르도록 함으로써 사회적인 질서를 만들고 공동체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믿고 지킨다면, 신은 그들에게 '구원' 을 제공하겠다는 일종의 계약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소설 『십계』 의 핵심인 '열 가지 계명' 은 십계명을 모티브로 하여 그 형식과 목적, 그리고 약속까지 충실히 활용한 장치입니다.


범인에 의해 제시되는 '십계' 의 주된 내용은 '섬을 떠나지 말고, 섬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부에 전하지 말 것, 기록을 남기지 말고, 너무 오래 모여 있지 말 것. 그리고 범인을 찾으려 하지 말 것.' 등입니다. 즉, 공동체를 외부와 단절시키고,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시도를 차단합니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섬 전체를 날려버릴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경고로 메시지를 끝냅니다.

 

범인이 만든 열 가지 규칙의 목적은 성서의 십계명의 목적과 아주 비슷합니다.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드러내고 그 힘을 인정하게 하여

자신이 제시하는 규칙을 따르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질서를 만들고 '안정'시킨다는 점,

그리고 규칙을 잘 지키면 '구원' 에 이르게 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규칙의 내용들은 성서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 규칙들이 필요한 '이유' 가 성서의 십계명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범인은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다.

 

사실 범인이 실제로 폭탄의 스위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규칙을 따르게 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살인' 때문입니다.

폐쇄에 가까운 환경의 장소, 열 명도 안 되는 집단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바로 곁에 살인자가 있는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나도 죽을 수 있다' 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공포는 살인자의 존재감을 거대화하고

'내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 로 인정하게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규칙을 어기면 모두가 죽는다.

 

'연대 책임' 에 대한 공포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자발적 감시자로 만듭니다.

없던 부칙이 생기거나, 규칙을 확대 해석하게 됩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 잘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모두가 사생활을 공유하며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이렇게 기준이 엄격해지고 '질서'가 생깁니다.

 

소설 속에서는 범인이 '연대 책임' 에 대한 공포심을 공동체에 심어줌으로써

구성원들로 하여금 지독한 긴장 상태 속에서 규칙을 따르게 하고

자신은 '질서의 바깥' 에서 더욱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심리적 클로즈드 서클

 

엄밀히 말하면 『십계』 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는 전형적 '클로즈드 서클' 의 법칙에서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섬은 외부와 통신이 가능하고, 언제든지 원하면 섬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열 가지의 규칙을 지정함으로써 섬을 '클로즈드 서클' 로 만들어버립니다.

 

외부와 연락은 되지만 정보의 공유를 사실상 차단합니다.

누군가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면 모두가 죽습니다.

게다가 외부인이 섬에 올 이유도, 올 필요도 없는 상황을 만들도록 합니다.

 

『십계』 의 클로즈드 서클은 범인이 만든 규칙에 의해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만이 클로즈드 서클을 '해제' 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섬에 갇힌 사람들은 범인의 규칙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구원' 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 는 전작 『방주』 의 세계관을 잇는, 유키 하루오의 성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단지 제목이 성서에 등장하는 단어들이라서 성서 시리즈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 와 '십계명' 은 성서 속에서 아주 중요하게 언급되는 사건들인데요,

각 사건들의 전후 상황을 보면 분명한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다.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방주' 와 '십계' 라는 성서 속 개념이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럽구요,

모두 읽고 나면 각 개념들이 소설 속 장치로써

목적과 의미, 기능하는 방식이 성서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 와 『방주』 는 성서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